프랭클린과 랜들 교수의 합작 연구 및 그 성과
영국에서 프랭클린은 랜들(John Ranciall) 교수의 추천으로 런던 킹스칼리지에 있는 그의 연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팀은 세포를 연구하는 생물물리학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X선 결정학 분야에 대한 기초를 이미 배운 터라 이 연구소에서 DNA를 결정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대학원생이었던 고슬링(Raymond Gosling)과 함께 이 분야의 연구를 진행했다. 한편, 그전부터 이 연구소에서 DNA에 관한 연구를 해오던 윌킨스는 프랭클린을 자신의 조수 정도로 생각하고 자신이 아직 초심자인 X선 회절 분야의 기술적인 면에서 그녀에게 많은 협조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DNA 분자의 화학적 분석을 연구하는 프링 클린은 물리학적 분석을 연구하는 윌킨스를 하나의 문제에 자신과 다르게 접근하는 동등한 연구자로 여겼고, DNA를 결정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자신만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윌킨스와 프랭클린은 연구실 안에 시의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 외에도 성격 차이와 의견 불일치 등으로 심한 갈등을 일으켰고, 그와 의심 각한 갈등 때문에 그녀는 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왓슨과 크릭처럼 아이디어를 교환하기만 했더라도, 1953년보다 더 일찍 DNA 구조를 규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왓슨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갈등의 원인을 모두 프랭클린에게 돌리고 윌킨스는 단순한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했다. 킹스 칼리지의 남녀차별도 프랭클린의 연구에 방해 요소가 되었다. 킹스 칼리지의 남자용 휴게실은 깨끗하고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던 반면 여자용 휴게실은 어두컴컴하고 좁았다. 또 교직원 식당은 남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랭클린은 학생들과 함께 학생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이처럼 그녀에게 킹스 칼리지에서의 생활은 매우 외로웠다. 그러나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그녀는 더 좋은 X선 회절 사진을 얻기 위해 낙후된 장치를 보완하고 새로운 장치를 고안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X선 회절 사진에서 얻은 DNA 결정에 대한 데이터를 극도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수학적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통해, 실제 DNA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인내하고 고생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DNA가 물을 포함하고 있을 때와 포함하지 않을 때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A형과 B형으로 구분하였다. 이 발견 하나만으로도 프랭클린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연구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선명한 DNA의 X선 회절 사진을 찍었으며, 그 사진이 함 의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는 통찰력으로 DNA의 구조를 알아내는 작업에 기여했다. 도둑맞은 업적 한 편 케임브리지의 왓슨과 크릭은 DNA를 연구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DNA 연구는 킹스 칼리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영국 특유의 페어플레이 정신은 킹스 칼리지의 DNA 연구에 케임브리지의 왓슨이나 크릭이 뛰어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전쟁 후 경제 회복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연구 기금이 매우 적었고, 따라서 같은 연구를 두 연구소에서 동시에 하는 것은 낭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왓슨과 크릭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한정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논리적인 DNA 모형을 원자모형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본업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DNA 구조를 알아내고 그 모형을 만드는 데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왓슨과 크릭은 당시 최고의 미국인 화학자였던 라이너스 폴링이 DNA 구조를 밝혀 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들이 만든 모형은 1년 전 자신들이 잘못 만들었던, 당-인산염 뼈대를 DNA의 안쪽 구조에 넣은 세 가닥의 나선으로 된 DNA 구조와 비슷했다. 폴링이 DNA 구조를 규명한 줄 알고 풀이 죽어 있던 왓슨은 결국 그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했으며, DNA 구조 규명을 위한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다시 DNA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왓슨이 폴링의 실패 소식을 윌킨스와 프랭클린에게 전하기 위해 킹스 칼리지에 갔을 때,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찍은 매우 훌륭한 DNAX선 회절 사진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 사진은 윌킨스가 프랭클린 몰래 복사해 둔 것이었다. 왓슨은 그 훌륭한 DNA X선 사진을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지고 심장이 방망이질했다고 그 순간을 묘사하였다. 그 사진에는 DNA가 나선 구조를 갖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 증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DNA 분자를 이루고 있는 사슬의 수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리고 윌킨스는 DNA의 뼈대가 바깥에 있고 그 내부에 염기가 있을 것이라는 프랭클린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고까지 왓슨에게 이야기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왓슨은 크릭에게 윌킨스로부터 들은 말과 프랭클린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곧 DNA 모형을 만드는 데 착수했다. 프랭클린의 주장에 따라 빠대를 바깥에 둔 DNA 모형을 조립하던 중 그들은 우연히 프랭클린의 정밀한 실험 데이터를 손에 넣었다. 랜들의 연구소에서 의학연구협의회의 평가를 받기 위해 연구원들의 연구 성과를 유인물로 만들어 위원들에게 배부했는데, 위원 중 한 사람이 프랭클린의 자료들을 왓슨과 크릭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프랭클린뿐만 아니라 킹스 칼리지 측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이 프랭클린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덕분에 왓슨과 크릭은 자신들의 모형이 프랭클린의 정밀한 측정 결과와 일치하는지 확인해 보면서 모형 제작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같은 연구실에 있던 결정 학자 도노휴(Jerry Donohue)의 도움으로 입체 화학적 법칙을 모두 만족하는 완전한 모형을 완성하게 되었다. 완성된 모형을 윌킨스와 프랭클린에게 보여 주자 두 사람 모두 왓슨과 크릭이 생물학에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프랭클린은 연구 데이터를 도난당한 것도 모른 채 그들의 발견을 진정으로 기뻐한 것은 물론 자신의 실험 결과를 보여 주며 자신이 당 - 인산염 뼈대가 분자의 바깥쪽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다 윌킨스와의 좋지 않은 관계와 킹스 칼리지의 차별적인 분위기에 괴로워하던 프랭클린은 1953년 이후 당대 최고의 결정 학자 버널(John, D.Bermal)이 있는 버크벡 칼리지의 버널 실험실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구조 연구에 착수하여 5년 동안 17편이나 되는 논문을 내고, 바이러스의 구조를 밝혔다. 또한 DNA 나선구조에 대한 왓슨과 크릭의 모형을 보다 정량적으로 모식 화하여 나선의 매개변수를 확고히 수립하고, 리보핵산의 사슬이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불행히도 그녀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난소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병마와 싸우며 죽음을 몇 주 앞두고도 실험실에 나와 연구에 임하다가,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지 여자라는 이 유로 왓슨이 DNA의 구조를 규명하기까지의 과징을 살펴보면 프랭클린의 자료 없이 과연 그 구조를 규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크리 이외의 다른 과학자들도 프랭클린에게 2, 3주 정도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그녀도 DNA의 구조를 밝혔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왓슨은 자신의 책에 프랭클린을 모필적으로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나선 구조를 반대하는 과학자로까지 묘사 하이 그녀가 전혀 DNA의 나선 구조를 눈치 채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프랭클린은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기 2년 전 킹스 칼리지에서의 강연에서 DNA 분자가 - 인산염 빼대를 바깥에 가지고 있는 나선 구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왓슨도 그녀의 강연에 참석했었다. 그런데도 왓슨은 프랭클린의 강연을 메모해 두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녀를 끝까지 나선 구조에 반대하는 과학자로 몰았다. 왓슨은 프랭클린의 자료를 몰래 본 것이 DNA 구조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책에서 프랭클린의 명예를 의도적으로 훼손시켰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프랭클린은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었다. 프랭클린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동료 과학자들에게 받은 모욕과 불평등은 오늘날에도 과학자 집단에 존재하는 성차별을 생각할 떼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프랭클린이 남자였다면 왓슨은 그와 같은 행동을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랭클린이 남자였다면 킹스칼리지의 분위기와 윌킨스와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매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 과학자로 길이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프랭클린은 이성이라는 이유로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난 사회적 편견과 냉대에 맞서 싸워야 했고, 특히 남성이 주도하는 과학 분야에서 그들에게 실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그의 책에서 내내 프랭클린을 왜곡시켰던 왓슨도 책 후기에서는 날이 갈수록 인정받는 그녀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성을 한낱 기분전환의 존재로만 생각하는 과학의 세계에서 그녀와 같은 고도의 지성을 갖춘 이성이 그토록 투쟁하지 않을 수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이해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알면서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한탄 한 마디 없이 고차적인 연구에 헌신적인 정열을 기울였다. 우리는 그녀의 그 용기와 성실성을 너무도 늦게 인식한 것이다.